"키르, 너를 해칠 생각은 없어."
키르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의 뒤에는 곤이 있었다. 곤은 물론 자신의 실력으로도 이르미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머리는 냉철하게 판단해냈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곤은 죽을거야. 식은 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르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오지마! 키르아가 주먹을 꽉 쥔 채로 외쳤다. 더 이상 다가오면 형이라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이르미는 키르아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버렸다. 그렇지? 검은 눈동자가 키르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키르아는 입술조차 떼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전신이, 모든 것이 이르미의 말, 행동 하나하나에 달려있다는 것을 키르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곤을 죽일거야..? 덜덜 떨리는 입으로 키르아는 기특하게도 말을 내뱉었다. 음, 글쎄. 이르미는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은 받았다는 듯 말을 끌었다. 살려줄지도 몰라. 키르아는 그 짧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곤은,
"죽여야겠지?"
쿵. 심장이 떨어졌다. 설마 내가 살려줄거라 생각한 거야, 키르? 안 본 사이 멍청해졌구나. 이르미는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의 감상을 말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괜찮아질거야. 너는 원래 뛰어난 아이니까. 예상치못한 자극에 잠깐 휩쓸린 것 뿐이야.
"고,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 그건 당연한 거잖아?"
저 아이가 네게 영향을 끼쳤을 리는 없지. 나는 단지 너를 위해 불확실한 요소를 없애는거야. 계속 두다간 오염될 지도 모르니까. 이르미의 손이 키르아에게로 뻗어나갔다. 그 순간 곤이 이르미의 앞을 막아섰다. 한 박자 늦게서야 그것을 눈치챈 키르아가 곤의 이름을 불렀다.
"곤!"
"키르아는 나와 함께 갈거야!! 그렇지, 키르아?"
곤은 키르아에게 동의를 구했다. 우리 함께 다니기로 했잖아. 두 팔을 양 쪽으로 뻗은 채 키르아 앞에 선 곤이 키르아를 돌아보며 웃었다. 곤. 순식간에 긴장에서 풀려난 키르아가 곤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나지막히 중얼거린 것에 가까웠다. 키르아의 시선이 곤의 얼굴에 닿았다가 곧장 이르미에게로 향했다.
"....난 돌아가지 않을거야. 곤이랑 함께 다니기로 했어. 이 곳 너머에 더 큰 세계가 있고, 더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다고 했어. 우리는 그 곳으로 갈거야."
위험해. 말을 하면서도 키르아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왔다. 키르아는 넨은 끌어올렸다. 저 쪽에서 움직이기 전에 먼저 친다. 어디든 좋아. 한 곳만이라도 부숴뜨리면 쫓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니만큼 도주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했다. 다행이야, 도망칠 선택지가 많아서. 이르미가 공격을 받은 순간 곤을 데리고 도망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키르아는 머리 속으로 애써 이르미를 향한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지워나갔다. 모든 감각이 이르미를 향했다. 제발 움직이기만 해라. 움직이는 순간,
"재미있어보이네, 이르미♠"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끼워줘♥"
"히소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곤, 오래만인걸♤"
히소카가 이르미의 말을 들은체 만체하며 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라, 히소카! 히소카가 왠일이야? 곤을 갑작스럽게 등장한 히소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만난 게 진심으로 즐거운 지 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한 곤을 보며 키르아가 한숨 돌렸다. 호기다. 히소카라면 곤을 눈여겨 보고 있으니 이르미가 곤을 죽이려들면 막아주겠지. 다행이야.
대치 상태는 여전했지만, 온 몸이 저릿저릿하던 넨의 기세는 전보다 덜했다. 키르아가 이르미를 올려다보았다. 이르미의 시선은 곤과 히소카에게로 향해 있었다. 곤란하게 됐네. 중얼거리는 소리를 키르아가 캐치해냈다.
"키르, 먼저 집에 가 있어."
이르미가 장침을 꺼냈다. 싫어. 키르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르미를 만난순간부터 유일하게 망설이지 않고 한 대답이었다. 흐음, 그럼 히소카.
"이만 돌아가줄래?"
"싫어♠"
"왜?"
"열매는 익기까지 손이 많이 가거든♣"
"금방 싫증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오래가네."
"어느 정도의 기다림은 에피타이져지♡"
슥. 히소카의 손이 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앗, 뭐하는 거야. 히소카! 나는 어린애가 아니거든? 그래그래♠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어른 대우를 해줄까? 히소카가 웃었다. 앗. 아냐, 됐어. 방금 뭔가 오싹했어!! 아쉽네, 원한다면 해주려고 했는데◆ 뭐야? 뭘 하려고 한 거야? 글쎄, 좋은 거? 으으. 곤이 팔뚝을 쓸며 한 발짝 물러났다.
"도망가는 거야, 곤?"
"아냐! 그냥 뭔가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좋은 감이야♥"
곤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히소카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검지손가락을 까닥였다. !! 순식간에 몸이 당겨지는 것에 키르아가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서 다리에 힘을 줬다. 지면을 딛고 힘을 주던 다리에마저 번지껌이 붙어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었을 때는 이미 히소카 앞으로 끌려온 후였다. 히소카의 몸과 부딪히기 직전에 멈춘 키르아는 히소카를 앞에 두고 이르미만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것을 후회했다. 둘 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인데 어째서 한 쪽에만 집중하고 있었지!
"도와줄까?"
그러나 귓가에 속삭이는 히소카의 말에 키르아는 눈을 크게 떴다. 불신한다는 표정으로 키르아가 히소카를 쳐다보았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 쪽에서는 그냥 던져보는 말일지도 모른다. 주저하는 기색을 눈치챈 히소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필요없어?"
필요하다는 얼굴인데♠ 노란 눈동자가 키르아의 얼굴을 잡아먹을 듯 관찰하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이르미의 넨과 코 앞에 선 히소카의 눈빛이 버거웠다. 거절? 내가 이 상황에서 거절을 할 수 있긴 한가? 키르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줘. 체면을 세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판단이 빠르네. 조르딕은 조르딕인가, 이 쪽도 제법 좋은 열매가 되겠는데. 하지만 둘 다 아직 일러♥ 히소카가 몸을 풀었다. 키르아는 둘의 기색을 살피다 곤을 잡아끌었다.
"가자, 곤."
"어? 키르아네 형은?"
"신경쓸 거 없어. 가자."
이르미가 발을 뗐다. 그러나 발을 디딜 곳에 박힌 카드에 공중에서 뒤로 걸음을 물렸다. 둘을 따라 가려는 시도가 저지되자 이르미가 히소카의 이름을 불렀다. 히소카. 응♠ 방해하지마. 싸워서 이기면 보내줄게◇ 떼어놓고 도망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 결국 얼마 못가서 붙잡히고 말걸? 실력도 호각인데다 넨 능력이 번지껌이니만큼 히소카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힘들다. 이르미가 장침을 던졌다.
"좋아, 이르미♥ 전력으로 덤비지 않으면 키르아가 도망쳐버릴거라구?"
"비켜, 히소카."
"흐응."
"히소카."
"키르아를 잡기 싫은거야?"
아, 설마 목표는 곤? 히소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난 상관없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 이순간에도 거리는 멀어지고 있을걸. 이르미가 장침을 쥔 손을 움직였다. 그렇지만 말이지, 역시 곤을 노린다면 기분 나빠질 것 같아◇ 곤은 내 열매야.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아. 마지막의 마지막에, 곤을 망가뜨리는 건 나여야하거든. 알아들어, 이르미? 넨이 피어올랐다.
"히소카의 취향은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하지만, 키르에게 영향을 줄지도 몰라."
"과보호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없어."
"유감이네♧"
"히소카야말로 과보호잖아?"
"내가?"
"응."
"모르겠는데♠"
히소카가 웃었다. 이르미는 더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싸우지 않을거야? 됐어. 이미 키르는 멀리 도망쳐버렸을텐데 뭐. 안 됐네♤ 히소카 때문이잖아? 탓하는 어조였지만, 이르미의 말투에서는 전혀 그런 뉘앙스가 나지 않았다. 고저없는 음색으로 아. 하고 말을 내뱉은 이르미가 물었다. 히소카는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 목적어가 빠진 문장이었지만 히소카는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아마 그리드 아일랜드가 아닐까? 그리드 아일랜드? 히소카는 일부러 곤과 키르아가 가지 않을 곳을 말했다. 이미 클리어한 곳이니 다시 가지는 않겠지. 흐음, 모르는 곳이네. 뭣하면 게임기 빌려줄까? 게임기? 히소카는 GI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히소카가 친절하면 수상해."
"그런 말 실례야♤"
"미안."
"음, 그러면 히소카도 같이 그리드 아일랜드에 가는거지?"
"?"
"히소카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그리드 아일랜드에 간 사이 키르아를 만날지도 모르고. 사실이라고해도 히소카도 곤을 만나고 싶으면 나와 있는 편이 낫지 않아?"
"……♥."
히소카가 웃었다. 사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머리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지만, 거짓말이야♧라고 말하기엔 타이밍이 나쁜데. 히소카는 기어코 변명을 찾아냈다. GI는 질려서♠ 가 본 적 있어? 제넨사를 찾으러. 그럼 GI에 대해서 잘 알겠네, 가자. 씨알도 먹히질 않네♤ 아무래도 지금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싶었다. 그렇다면 접속한 다음에 바로 로그아웃을 해버려야지. 처음 시작하는 곳에서 이르미가 기다리긴 하겠지만, 스스로 살아남겠지. 그리고 돌아오면 오류라고 말하지 뭐♤ 히소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히소카, 좋은 일 있어?"
"아니♣"
그거 거짓말이지? 우뚝, 걸음이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해? 질문을 골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히소카는 가끔 거짓말할 때 티가 나니까.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그래? 다들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히소카의 눈동자가 이르미의 얼굴을 훑었다. 무표정한 얼굴. 이따금 감정이 드러나긴 했으나, 감정이 드러나? 아, 읽힌다. 히소카의 웃는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이런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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