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혼녀 주의/키쿄우 자의적 캐해석 주의
몰지각의 관계
이르미 조르딕 with 히소카
저택의 복도는 넓고도 적막했다. 간간이 들리는 대화 소리만이 누군가가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르미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전 손등으로 방문을 두드려 노크를 했다. 안에서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여질만한 소리를 들리지 않았으나, 이르미는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이르미는 방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애초에 이 곳은 자신의 집이었으니까.
어지러진 방 안 풍경을 보면서 그는 의문을 표했다. 방을 내어준 손님은 분명 방을 제멋대로 쓰는 성격이긴 했으나, 방석을 찢어놓는다거나 화병을 깨어놓는 짓을 즐겨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보아온 행동을 기반으로 추측해보았을 경우였다. 하지만, 갑자기 그러고 싶어졌을지도 모르지.
소파 위에 반으로 찢긴 베개에서 날린 털들이 소파 아래까지 하얗게 엉망이었다. 이르미는 작게 혀를 차곤 집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걸음을 옮기다 발치에 걸리는 게 있어 내려다 보니 벽에 걸려있어야할 액자였다. 낯익은 테이블은 원형을 잃은 채로 뒤집힌 채였다. 발에 밟히는 나무조각이 거추장스러웠다. 히스테릭함이 배어 나오는 살풍경함을 보면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히소카, 그는 응접실과 이어진 방 안에 서있었다. 밖으로 향한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조르딕에서도 유난히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동생들의 조름에 넘어가 이 곳에서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환한 햇빛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번을 거절했다. 햇빛을 피해다니는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찾아다니는 것 또한 성격에 맞지 않았다. 저택의 높이만큼 울창하게 자란 상록수들이 드문드문하게 그늘을 만들었다. 미르키가 툴툴거리는 소리, 카르트가 말을 거는 소리, 키르아가 창문에 기대어 앉아있을 때 그 속눈썹 아래에 내리깔린 그늘. 화창한 여름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햇빛이 들어오기 쉬운 큰 창은 깨지지 않은 유리를 찾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유리뿐만이 아니라 틀이 통째로 부숴진 것도 보였다. 아깝다거나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부서진 것은 새것으로 갈고, 망가진 것은 고치면 그만이었다. 이르미는 문의 경계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르미의 걸음은 암살자답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나, 히소카는 고개를 돌려 이르미를 마주보았다. 그의 손에는 여자의 목이 틀어잡혀있었다. 그 광경에 환한 햇빛이 그들을 내리쬐고 있어 이르미는 손을 들어 눈 옆으로 햇빛을 가렸다.
"안녕♠"
"저거 다 히소카 작품이야?"
"아니. 저거라면 이 쪽 작품이야."
"그녀가?"
그럴 이유가 없을텐데. 이르미는 자신의 약혼녀를 쳐다보았다. 한바탕 난리를 친 모양인지 머리카락은 산발이었고, 발에 신겨져 있어야할 구두는 한 쪽이 보이지 않았다. 숨은, 아직 쉬고 있군. 도르륵, 눈동자만을 굴려 히소카와 제 약혼녀를 번갈아본 이르미가 입을 열었다. 여긴 손님방이니 굳이 그녀가 나타나서 난장판으로 만들 이유는 없어. 그 말은 분명, 그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었다. 히소카는 대답을 하는 대신 웃었다. 마주한 얼굴에는 옅게 생채기가 나있었다. 아마도 손톱이 스쳐지나간 자국. 이미 상처 주위로 피가 굳어있는 걸로 보아선 가장 먼저 생긴 상처. 히소카의 손에 매달린 여자의 다리가 달랑거렸다. 이르미는 그녀의 목을 쥔 히소카의 손을 풀어내는 대신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죽일거야?"
"아니♧"
"별일이네."
"흐응, 죽여도 상관없어?"
그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죽여도 돼? 허락을 구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왜 죽여도 되는지를 묻고 있었다. 이르미는 고민하지 않고 답을 들려주었다.
"이 정도로 죽어버릴거였다면, 쓸모없을테니까."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은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심 자신이 그에게 그녀를 풀어줄 것을 부탁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간에 이르미의 대답에 히소카가 순순히 손을 풀었다. 그러자 여자의 몸이 침대로 떨어졌다. 매트리스가 출렁이며, 그 몸을 받아냈다. 여자는 작게 표정만을 찡그렸을 뿐 별 반응은 없었다. 히소카는 싸움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먼지를 먹은 머리카락은 본래의 색보다 희미하게 보였다.
"왜 싸운거야?"
히소카는 놀란 얼굴을 했다. 네가 그런 것을 다 묻냐는 표정이었다. 이르미는 피곤해져감을 느꼈다. 별로 한 일도 없건만 그를 만나면 언제나 이랬다. 평소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하니 그런지도 몰랐다.
"싸우는 것엔 이유가 필요없어◆"
"방금 전까지 한 것 말이야."
"걸려오는 싸움을 피하진 않는 주의라서♤"
대화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물음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채로 시간을 허비해버릴 것이다. 저택의 고용인도 아닌 명색의 자신의 약혼녀인 만큼 이렇게 된 것에 대한 경위를 알아야했다. 사실 그보다는 실버나 키쿄우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
"그녀는 내 약혼녀야."
"오, 얼굴이 바뀌어서 몰라봤는걸♠"
맞는 말이었다. 이전의 히소카가 방문했을 때의 약혼녀와 다른 이였으니 당연한 소리기도 했다. 약혼녀인 것을 몰랐으니 응당 히소카는 손속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고용인 정도로 생각했겠지. 아니 약혼녀인 것을 알았다하더라도 바뀔 것이 있었겠냐만은.
"정정하지. 새 약혼녀."
"나더러 누구냐고 묻더군♥"
그래서 공격한 거야? 히소카는 큭큭 소리내어 웃었다. 날 어떻게 보는거야, 이르미♣ 아무리 나라고 해도 누구냐고 묻는 말에 싸우려들지는 않는다고♤ 이르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히소카의 대답에 대해 애매한 평가를 내렸다. 글쎄, 히소카는 상대가 하는 말에 따라서 공격할지말지를 결정하는 스타일은 아니지 않아? 그냥 마음에 안 들면 죽이는 거잖아. 이르미, 내 말 좀 들어줄래? 좋아, 말해봐.
"그래서 이르미 네 친구라고 했어."
"그걸 믿었어?"
"아니, 전혀♥ 허튼 소리말라고 날뛰던데. 이르미님에게 친구 따위가 있을리 없대. 크큭."
"맞아, 난 친구같은 거 없어."
"그럼 난?"
"동업자."
"그것도 괜찮군♠ 다음번엔 동업자라고 해볼까."
친구와 동업자. 그 단어들이 가진 의미의 간극이 유사한 단어라 할 수 없을만큼 큼에도 불구하고, 히소카는 면면에 화색을 띠고 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라고 했더라도 표정의 변화는 없었을 것처럼.
"그래서 이 난장판이 된 거야?"
"아아♥ 그래도 내가 부순 건 몇 개 없어."
"어머니가 화내시겠는데."
"목숨은 살려줬으니까 봐 줘◇"
"기왕 건드릴거면 깨끗하게 처리해줘. 뒤처리가 귀찮으니까."
"약혼녀도 조르딕 사람 아냐?"
"약혼인걸, 후계를 낳기전엔 아니야."
"저런, 빡빡한데."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니 귀찮네. 이르미가 바닥에 흘러내린 요를 손가락으로 집어 침대위로 던지며 말했다. 그러게, 사실 조르딕은 손님이 달갑지 않은 거 아냐? 손님 취급하기 귀찮다거나, 아니면 얼른 가버리라는 뜻?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르미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걸터앉은 히소카가 웃었다. 그렇지? 다음엔 그냥 요 근처에 호텔을 잡도록 할까♣
"그럴 생각 없으면서."
"이런, 들켰어? 그렇지만 여기 몇 번 들리다보니 호텔보다 편한걸◆"
"아버지가 언제든 와도 된다고 하셨으니 상관없어."
"오, 그럼 실버가 안된다고 하면 못 들어오는 건가?"
"뭐 정원정도까지는 괜찮겠지. 문을 열 수 있는 자에게는 열려있으니까."
"유감인데, 문을 여는 의미가 없잖아."
"히소카는 우리집에 자러와?"
"겸사겸사♧"
"어머니가 내쫓으라고 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아."
"완전히 알기 전에 알려줘♠"
히소카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기대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소파의 등받이 부분이 뒤로 폭삭 무너졌다. 뒤에 공간이 넓직하지는 않게 남아있던 덕분에 몸이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았으나 벽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혔다. 아마도 싸움으로 망가진 모양이었다. 히소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바꿔야겠네."
이르미는 집사를 불렀다. 새로운 소파가 방 안에 들어서는 걸 보면서 히소카가 물었다. 저건 어디서 가져오길래 이렇게 빨라? 여분으로 몇개 주문해놓은 걸 보관하고 있어. 그 와중에 약혼녀는 집사들의 손에 의해 옮겨졌다.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니까. 뭐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하는 물건들은 주문제작이기도 하고 그 때마다 주문하긴 귀찮거든. 집사가 이르미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 안은 아까 전의 소란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도련님, 말씀하시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다른 가구들은 괜찮습니까? 이르미가 히소카를 보았다. 음 나야 딱히 사용하는 게 없으니까 뭐, 침대랑 소파정도만 멀쩡하면 괜찮아♤
"그럼 침대는."
"?"
"침대는 멀쩡해?"
이르미의 물음에 히소카가 다리로 침대를 걷어찼다. 아래부분을 걷어찼기 때문에 덮혀있던 이불과 매트리스, 침대다리가 공중에 잠깐 떴다가 가라앉았다. 쿵, 무거운 침대가 대리석 위로 떨어지면서 큰 소리가 났지만 히소카는 물론 이르미도 개의치 않았다.
"멀쩡하네◇"
"다음부턴 히소카 앞으로 청구할 거니까 조심해."
"쩨쩨하긴♤"
"마님으로부터 메시지입니다."
<오후 2시, 티타임> 간결한 문장의 메시지였다. 히소카는 자신은 됐다고 대답했다. 무언가를 거절하는 히소카의 모습은 오랜만이라서 이르미는 잠깐 고민했지만, 그 아래에 적혀있는 줄을 읽어주었다. - 손님도 '꼭' 참석할 것 - 그렇다는데, 히소카? 없다고 전해줘♤ 안 돼, 어머니가 소리지르면 꽤 시끄러운걸. 거기에 아버지까지 어머니 편을 들면 귀찮아. 히소카가 침대에 누운 채로 뒤척였다.
"진짜 없다고 해주면 안 돼?"
"응, 안 돼."
"아, 정말♣"
"왜 싫어하는 거야?"
그 부부의 끈끈한 애정행각 같은 거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차인지 독인지 모를 마실 것 맛도 없잖아◇ 애정표현같은 건 나도 별로 본 적 없는걸. 애초에 아버지는 애정표현이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ㅡ 여기서 히소카는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쪽은 주구장창 하고 있지만 이르미 네가 눈치못채는 것 뿐이야♤ㅡ 음, 차는 맛있는 걸로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해. 독성은 좀 더 강해지겠지만. 이르미, 방금 그거 무시? 어쨋거나 별로 내키지 않는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그들은 티타임이 열리기로 한 장소인 정원으로 나왔다. 이미 정원에는 테이블 한 가득 세팅이 된 상태였다.
"어머머, 왔군요!!!"
"...그러게♥ 별로 오고 싶진 않았는데"
"어머, 그런 말은 실례랍니다."
"어머니, 이게 다 뭐야?"
키쿄우의 티타임은 종종 늦은 오후 무렵에 열리곤 했다. 티타임에 참석하는 이라고 해봐야 이르미나 카르트, 혹은 실버 정도. 그들도 의뢰를 하러 집을 비우는 날이면 집사들을 데리고 열기도 했다. 오늘은 그런 평소때보다 많은 종류의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그녀의 티타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희귀한 모양의 다기까지 테이블에 펼쳐진 것을 보았을 때 이르미는 눈을 깜빡였다. 자주 참석한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건 예전에 제가 조르딕으로 들어오던 날 어머님이 저에게 해주신 티파티때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이랍니다. 이번에 들어온 새아가는 제법 오래 버티는 것 같아서 티파티를 해주려고 했는데, 오늘 아쉽게도 탈락해버렸지 뭐예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조촐하게나마 티타임을 갖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였죠?"
"히소카♠"
"이르미말로는 동업자라고 하던데, 생각보다 오래 동업하나보죠?"
"의뢰하는데 조르딕만한 곳은 없으니까♣"
그렇군요. 생각보다 심드렁한 대답에 키쿄우는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티타임이 아닌가. 키쿄우는 차를 조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작은 병에서 한 방울씩 액체가 똑똑 떨어질 때마다 찻잔 안에선 산이라도 끓는 것처럼 액체가 부글부글 끓었다.
"놀랍군◇"
"어머니의 독제조 실력은 가문 내에서도 수준급이야."
"그럼 이르미도 저 정도?"
"아니, 할머니나 가능할까."
네 할머니? 본 적이 없는데◇ 보통 그 나이쯤 되면 이미 죽었지 않아? 배려심 없는 물음에도 이르미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냐, 아직 정정하셔. 아무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하곤 다들 자기일에 몰두하셔서 1년에 한두번쯤 마주치려나? 호오, 그럼 강해? 히소카 다운 질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저택을 뒤지진 말아줘. 말려들어서 히소카가 죽어도 난 몰라. 대화를 하던 사이에 차가 완성되었는지 키쿄우가 그들 앞에 찻잔을 놓았다.
"재료를 듬뿍 넣은거니 아낌없이 들어요."
찻잔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 티타임자체는 조용했다. 미슥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면서 히소카는 이 안에 뭐가 재료로 들어갔을지를 어림잡아 유추했다. 잔 안에선 검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거 영 내키질 않는걸♥ 이미 절반쯤 마신 지금도 그는 이 차가 먹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어차피 먹어야할 것이라면 다 먹어버리는 것이 낫겠으나, 키쿄우는 잔이 비면 다시 채워줄 기세라 히소카는 잔을 든 채로 딴청을 피웠다.
"티타임치고 너무 조용하군요."
집사인 코보네였다. 코보네, 코보네도 마시겠어요? 권유는 끝이 없었다. 아닙니다, 마님. 제가 그 귀한 것에 손을 댈 수는 없죠. 아쉽지만, 세 분이서 드시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히소카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귀한 거라, 전혀 모르겠어. 최고급 재료로 만든 쓰레기같은 건가. 재료를 알면 확실히 먹기 아깝겠지.
"쿨럭."
히소카가 잔기침을 했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뱉은 기침에서 피가 섞여나왔다. 대단한데◇ 이 짧은 시간에 이정도 효과라.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에게 키쿄우가 손수건을 건냈다. 옅은 분홍빛을 띈 천에 금색실로 수놓아진 손수건. 키쿄우의 소유물 치곤 제법 단정한 인상을 남기는 물건이었다.
"저런,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나보군요."
"가끔 먹다보니…"
"그럼 이 곳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티타임을 가질까요?"
난데없는 청천벽력에 히소카가 손을 닦던 손수건을 떨구었다. 주으려 몸을 틀자 콜록, 잔기침이 새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은 이르미가 대신 주워 테이블로 올렸다. 히소카가 올려진 손수건을 집어들자 이르미가 말렸다. 더러우니까 이걸 써. 이르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것을 꺼냈다.
"손수건을 들고다녀?"
"음, 집 안이니까."
일일이 집사를 부르긴 귀찮거든. 이르미가 손수건을 꺼낸 옷은 편안한 복장이었다. 검은색 바지 위로 입은 상의는 팔꿈치를 덮었지만, 평소보다 편한 복장인 것은 사실이었다. 히소카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 둘을 살펴보는 키쿄우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올려 차를 마셨다.
"동업자라는 건 생각보다 말랑한 관계인가 보죠?"
"?"
"어머, 말이 헛나왔군요."
이르미와 히소카 둘 모두 의아한 눈초리로 키쿄우를 쳐다보자 키쿄우는 말을 돌렸다.
"날씨가 참 별로네요, 햇빛도 선선하고, 바람도 좀 불고."
키쿄우는 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그러다 잔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다시 힘을 뺏다. 하마터면 귀한 잔을 부서버릴뻔 했다. 키쿄우는 히소카의 옆 얼굴을 흘겨보았다. 제 아들이야 눈치가 없어서 모른다하더라도 저 쪽은 눈치가 빠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쪽을 떠볼 심산인가? 키쿄우는 의외로 심리전에 강했다. 생각없이 말을 뱉고, 시끄럽다고 하는 인상들은 키쿄우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했다. 조르딕은 교양없고 그저 시끄럽기만 한 여자를 안주인으로 맞아들일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르딕을 손에 쥘만큼 대단한 여자였다.
"그래서 동업을 한지는 얼마나 되었죠?"
"6년 정도?"
"아, 그정도 된 것 같아."
키쿄우는 소소한 질문을 던졌다. 몇 번쯤 대답을 해주던 히소카가 슬슬 흥미를 잃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차의 종류가 궁금하진 않은가요?"
"글쎄, 별 관심없어♥"
관심없다. 그 말을 곱씹던 키쿄우는 아,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관심있는 것에 한해서만 눈치가 빠른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본인의 흥미가 없는 부분엔 모르는 척 혹은 모른 채 넘어가버린다는 말이었다. 무시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곤란한데….'
키쿄우는 입맛이 썼다. 횟수로 네 번째였다. 히소카에게 달려든 거나 이르미에게 파혼해달라고 한 약혼녀의 수가 모두 합해 넷이란 소리였다. 키쿄우가 이르미에게 약혼녀와 시간을 갖도록 조언하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이르미는 말주변이 없었고 그를 고려해 눈치가 빠른, 이르미보다 먼저 이르미의 생각을 눈치챌 만한 이들을 골랐던 것이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르미는 조르딕에 머무르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고, 어쩌다 길게 머무르는 날이면 십중팔구 그가 손님으로 방문한 시기였다. 그를 조르딕 밖에서도 만난다는 말을 들었을 땐, 키쿄우는 이르미가 친구를 사겼기 때문에 각별한 것이라고 여겼다.
"친구인가요?"
"아니, 동업자야."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진. 이르미, 괜찮아요. 암살자는 본래 고독해야하는 법이지만, 친구 하나 정도 있다고 해서 약점잡힐 일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타일러보기도 했다.
"아니야, 우린 그냥 동업관계야. 돈을 주면 의뢰를 받아주고, 도움을 요청하면 가끔 도와주는."
아무리 들어도 뒤 쪽은 친구 아닌가요. 키쿄우는 그 말을 하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해온 엘리트교육법이 문제였나. 이르미는 무언가를 대하는 데 서툴렀다. 그 무언가는 동물이 될 때도 있었고, 사람이 될 때도 있었고, 관계가 될 때도 있었다.
이르미는 첫 아이라서, 처음 키워보는 아이었기 때문에 키쿄우와 실버는 보다 더 높은 허들을 요구했다. 암살자는 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친구는 불필요하지. 그러니까 시행착오였다. 이르미에서 미르키, 미르키에서 키르아, 키르아에게서 카르트로 넘어갔을 때 그제서야 둘은 깨달았다. 이르미에게 기대했던 것은 보통 수행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이르미는 누구보다도 잘 해냈기 때문에 둘은 몰랐다. 그래서 미르키에게 실망했고, 키르아에게서 놀랐으며, 카르트에게서 인정했다. 이 아이는, 기계에 가까웠다. 능률과 효율.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르미에게 설정해놓았던 기준을 기꺼이 떼어냈다.
"하나 쯤은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과였다. 미안해요, 이르미.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 거부한 것은 이르미였다.
"어머니, 무슨 말을 하는거야?"
키쿄우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실 이르미가 키르에게 집착하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키르아는 느끼고 내비치는 감정이 다양했다, 이 조르딕에서 컸다는 사실이 놀라우리만큼. 수년간의 교육 끝에 생긴 그늘을 감안하여도 태양까지는 못되더라도 달 정도는 능히 될 수 있는 아이었다. 아주 훌륭하게 컸지. 키쿄우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조르딕 내에서, 이르미의 대척점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 이르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키르아로부터 채우려고 하고 있었다. 아귀가 새카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감정들이 이르미와 부딪힌다면, 글쎄 과연 둘 다 무사할까? 키쿄우 조르딕은 그에 회의적이었다. 결국 둘 다 망가지느니, 차라리 망가진 하나만 놔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찌됐거나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아들은 키르아였으니.
"그 자의 이름이 뭔가요?"
"히소카."
그렇지만 포기하기엔 일렀다. 내 아들 옆에 누가 오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내 눈 앞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느니 다른 이에게라도 맡기는 편이 나을 거라고 키쿄우는 생각했다.
"그를 초대해보겠어요?"
그녀는 지금 난관에 봉착해있었다. 저 자는 관심이 없는 것에 한해 눈치가 없다. 무시해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 아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겠지. 그 사실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그녀는 기분이 나쁜 정도를 넘어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내 아들인데! 거기다가 자기 손수건까지 건내주기까지하는 배려심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대체 왜! 뭐가 모자라서!! 이르미 저런 놈의 어디가 좋은 건가요?
"아, 그러고보니 이르미 오늘 의뢰는 없나요? 뭔가 하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응, 그거라면 취소했어."
아아. 이 정도 지경이라면 분명 제 아들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이렇게 신경줄이 무디어서야. 모른다면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싶었으나 눈 앞에서 동업자, 동업자거리는 꼴이 아주 뵈기 싫을 정도였다. 어쩐다 어쩌면 좋지? 키쿄우가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차만 마신 채로 티타임이 끝나버릴 것이다. 도와줘요. 키쿄우가 간절한 눈으로 츠보네를 보았다.
"두 분이 놀이삼아 한 번 겨뤄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난데없는 제안이었다. 히소카는 단번에 수락했다. 티타임에서 더이상 티를 즐기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은 확실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큰 도련님쪽인데. 역시나 굳이 싸워야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것도 수십년간 모셨기때문에 알아보는 것이 가능한 일. 츠보네가 이르미에게 말을 꺼냈다.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사내지 않습니까, 큰도련님. 탐색할 기회는 많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 이번에 이르미가 지면 무덤에 꽃다발이라도 놓아줄게♤"
"히소카가 지면?"
"그럴 일은 없을거야◇"
이르미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츠보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저 사내가. 코보네는 한쪽 안경을 들추어올렸다.
"츠보네, 꽃다발 준비해줘."
로맨틱하군요, 서로의 무덤에 꽃다발이라. 흐뭇한 얼굴로 둘을 보는 코보네에게 키쿄우가 소리를 질렀다. 츠보네, 지금 그런말 할때가 아니잖아요!! 무덤에 올리는 꽃다발이 무슨 소용이에요!!!!
"히소카 무슨 꽃이 좋아? 곧 준비해야하니까 말 해."
"쓸모없을테니 그냥 둬◇ 이르미야말로 어떤 게 좋아?"
"꽃은 별로."
"동감이야♥"
공중에서 부딪혔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키쿄우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저 둘에게 깨우쳐주는 것은 무리일 듯 싶었다. 그러다 빠르게 스쳐가는 이르미의 얼굴에 깃든 무표정이 생각보다 들떠있음을 알아챘을 때 키쿄우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알지 못한다한들 어떤가.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해도 제 아들이 즐거워하는데.
"츠보네, 유성가에서 데려오기로 했던 후보들은 보류하기로 해요."
"네, 마님."
키쿄우는 차를 들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차의 목넘김이 좋았다. 저건 10분쯤 뒤에 말리도록 하고, 나는 먼저 일어날게요. 내용물을 다 마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키쿄우는 다시 한 번 여전히 싸우고 있는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아, 멍청한 사내들같으니.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키쿄우의 입술은 분명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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