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히소이르]어떤 종말의 시작 1
* 히소곤 / 이르키르 베이스 有
* 캐릭터 사망주의
1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달도 얼굴을 감춘 밤이었다. 싸늘하게 느껴지리만큼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타고 흘러와 방안을 식혔다. 이르미는 창가에 걸터앉아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이르미는 느껴지는 기척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새카만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기척의 주인공은 예상했던 바와 다름없이 히소카였다. 이르미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히소카를 쳐다보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 이르미가 목을 가다듬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목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히소카. 그는 히소카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금 이어지는 침묵.
"키르가 죽었어."
대답은 없었다.
"키르아가 죽었어."
나의 키르아. 음색이 없는 단조로운 음성은 슬픔에 젖어있었다.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물이 가득 쏟아질 듯 했다. 히소카는 그가 이토록 감정적인 순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수면아래의 비탄에 잠겨있었다. 히소카는 넘실거리는 비애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상상을 했다.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묘사였다.
"무엇이 그 아이를 떠나게 했지?"
"무엇이 그 아이를 내게서 떠나게 했지?"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 답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히소카가 알고 있는 물음의 답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히소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르미에게 슬픔이 어울리지 않듯이 그에게도 침묵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런 히소카를 보고 웃는 듯 이르미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탁, 소리나게 창문에서 바닥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히소카의 팔뚝을 잡아챘다.
"곤, 그 아이."
그 녀석이 내게서 키르를 앗아갔어. 만만찮은 악력이었다.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거리에서 히소카는 이르미를 마주보았다. 히소카는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주려 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나 이르미는 그 짧은 순간도 기다리지 않고 강하게 히소카를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깨어진 힘의 균형에 히소카의 오른쪽 어깨에 이르미의 오른쪽 어깨가 닿았다. 앞으로 반쯤 구부러진 그 귓가에 이르미는 천천히 물음을 던졌다.
"그 아이를 어디에 숨겼어?"
"……."
"히소카지?"
그 아이를 숨긴 게. 팔뚝을 잡고 있는 손의 악력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다. 귓가에 속삭이는 물음에도 히소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소카, 말해."
"몰라♤"
"히소카."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잖아?"
이르미는 마른 세수를 했다. 그래, 순순히 말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 히소카라면 그럴 거라고ㅡ여기서 이르미는 말을 하다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다시 한 번 손바닥이 눈가를 훔쳤다. 그가 얼굴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빨갛게 살이 일어났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붉게 남은 자국은 눈물이 흘러간 궤적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숨길 거라면 꼭꼭 숨겨놓는 게 좋을거야. 눈에 띄면,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줄거니까."
"그래? 만나게 된다면 전해줄게♡"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했으나, 히소카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은걸. 물론, 곤 쪽도 상태가 좋진 않았다. 키르아가 죽는다면, 그건 아마도 곤을 지키기 위해서일 거라는 생각정도는 해본 적이 있었다. 언제까지 만약의 경우였지만, 실제로 일어나버리니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곤의 흔적을 쫓아온 조르딕의 집사들을 몇 명정도 죽이고 나서야 히소카는 이르미의 집요함을 알아차렸다. 모두 다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사람을 보내왔다. 아무래도 히소카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확실히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와중에 곤에게 입은 상처가 두어개 정도,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상황은 확실히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르미."
여자의 목소리였다. 히소카는 그것이 키쿄우임을 알아차렸다. 화려한 색의 드레스는 검은색의 드레스로 바뀌어져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마저도 쓰지 않은채, 그녀는 검을 베일로 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히소카는 그 얼굴이 이르미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응."
"준비가 끝났어요."
키쿄우의 말에 이르미는 몸을 돌렸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히소카는 뒤에서 천천히 그들이 향하는 곳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조르딕의 저택은 확실히 크다라는 말로 수식할 수 있는 정도의 곳은 아니었다. 대리석타일이 깔려있는 복도를 지나면 넓은 홀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곳에는 역대 조르딕가의 사람들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그 공간에 지금 키르아의 관이 있었다.
누워있는 키르아의 주위를 감싸는 꽃들과 수많은 촛불들. 이르미는 계단을 건너뛰어 관 바로 앞에 섰다. 지난 사흘동안 조르딕은 키르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예법입니다. 츠보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삼일 전에 집사들이 먼저 확인했던 키르아는, 사람의 형체라고 할 수 없었다. 찢겨진 몸을 이어붙여 온전한 형체로 바꾸는 데 꼬박 삼일이 걸렸다. 이르미와 키쿄우를 비롯한 집안 사람들은 지금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히소카는 자신의 옆에서 코를 훌쩍이는 미르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멍청한 놈. 제대로 발음되지 않는 입에서는 분명 울음과 함께 그 말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에 발을 딛고 서있는 모두가 슬퍼하고 있었다. 기이하군♥ 이들이야말로 죽음에 가장 무감각한 이들일진데. 그러나 히소카는 거기에서 말을 멈췄다. 이르미가 관 안을 향해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키르아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키르. 이르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있을리 없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이르미는 말을 이어나갔다. 말이 많지 않은 그답지 않았다.
"날씨가 참 좋지?"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히소카의 옆에 서 있던 미르키는 기어코 완전한 울음을 터뜨렸다. 소매자락으로 눈가를 벅벅 닦는 그의 옆에서 히소카는 팔짱을 낀 채로 모두를 쳐다보았다. 잠을 자 듯 눈을 감은 키르아, 아침 인사를 건내듯 조용히 말을 거는 이르미. 어느 것 하나 제대로인 것이 없었다. 히소카는 집 안에 있을 곤을 떠올렸다. 이르미가 괜한 고집을 피우지 않으면 좋을텐데◆ 이르미가 키르아의 뺨에서 손을 뗐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내려오던 그는 별안간 걸음을 돌려 다시 한 번 관 앞에 섰다. 너를 누워있게 만든 모든 자들에게 합당한 결과를.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귀에 똑똑히 박혔다. 이르미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 걸음은 분명 그렇게 빠르지도 그렇다고해서 그렇게 느리지도 않았다. 그것을 보던 히소카는 저택의 열린 문으로 나갔다.
"오늘은 들르지 못하겠군♤"
히소카는 자신의 뒤를 밟는 그림자를 알고있었다.